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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undance and poverty

abundance and poverty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공장에서 실제 작업을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2025년 9개월 동안만 610건의 로봇 투자가 이루어졌고, 총액은 70억 달러에 달한다.

모건스탠리는 2050년까지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이 5조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 세계적으로 약 10억 대의 로봇이 배치될 것이다. 그 중 90%는 산업과 상업용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미래 뒤에는 거론되지 않는 불편한 질문들이 숨어 있다. 로봇이 가치를 창출하면, 그 가치는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풍요의 시대에서 빈곤과 가난은 과연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Value Creation

경제학의 출발점은 가치 창출이다. 가치 창출이란 자원을 투입해 더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빵집 주인이 밀가루, 노동, 오븐을 사용해 빵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 이익을 남긴다. 테슬라가 리튬, 강철, 엔지니어링 인프라를 결합해 스스로 운전하는 전기차를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가치 창출이다.

오븐을 사용해 빵을 만드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가치 창출에 해당한다.

한편, 마리아나 마추카토(Mariana Mazzucato)는 가치 창출이 단순히 기업의 활동만이 아니라,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 공교육, 인프라 같은 사회 전체의 과정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MIT가 인터넷의 기초 기술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구글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 정부가 GPS를 개발하지 않았다면 우버나 Airbnb 서비스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 경제학에서 "가치"는 정부와 기업, 개인 등 다양한 주체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다. 그렇다면 이 공동의 가치가 실제로 누구의 몫이 되어야 하는지, 곧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과 “이미 만들어진 가치를 가져가는 활동”을 어떻게 구분할지의 문제가 생긴다.

마추카토는 여기서 가치 창출(value creation)과 가치 추출(value extraction)이 뒤섞여 있는 것이 현대 경제학의 큰 맹점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빅테크 기업이 공공 연구와 인프라를 토대로 성장한 뒤, 막대한 이익을 다시 자사주 매입에 쏟아붓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기업은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가치를 더 만들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이윤을 주주와 경영진에게 유리하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가치를 추출’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로봇 경제의 부상은 이 문제를 한층 더 첨예하게 만든다. 로봇과 AI 시스템은 24시간 작동하며 오류와 피로 없이 생산성을 크게 끌어올려 분명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만, 그 기술적 기반에는 오랜 기간 축적된 공공의 연구, 교육, 인프라가 깔려 있다. 그럼에도 로봇을 소유한 자본이 그 성과를 거의 전부 가져간다면, 이것을 순수한 가치 창출의 보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공공이 함께 만든 가치 위에서 과도한 몫을 추출하는 구조로 볼 것인지를 되묻게 된다. 지금 묻지 않으면, 우리는 또 반복되는 역사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Historical Lessons of Abundance

1760년부터 1840년까지, 영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생산성 폭발을 경험했다. 면직물 산업의 기계화가 그 중심이었다. 제임스 하그리브스의 스피닝 제니,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 에드먼드 카트라이트의 역직기. 이 기계들은 기존 상품의 생산성을 10배, 20배, 100배 증가시켰다.

가치 폭발에 크게 기여했던 산업 혁명은 빈곤을 해결했는가?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1780년부터 1840년 사이, 실질임금은 오르지 않거나 오히려 떨어졌다. 그 사이 수십만 명의 숙련된 직조공들은 기술 변화에 밀려 일자리를 잃고, 한순간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노동의 질이었다. 역사학자 E.P. 톰슨이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보여주듯, 공장 시스템은 노동자의 자율성을 체계적으로 지워버렸다. 예전에는 최소한 자기 속도와 방식대로 일할 여지가 있었지만, 공장 안에서는 오로지 기계의 속도에 몸을 맞춰야 했다.

생산성만 놓고 보면 성공적이었다. GDP는 몇 배로 불어났고,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부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 과실은 대부분 공장 소유주에게 돌아갔다. 자본 소득 비중은 급격히 늘어났고, 반대로 노동 소득 비중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20세기 중반 미국에서는 한동안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1947년부터 1980년대까지는 생산성과 고용이 함께 상승하는 듯 보였다. 자동화가 일부 일자리를 없애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장 노동자와 사무직 근로자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농업에서 밀려난 인력이 그 자리를 채웠다. 소득이 늘면서 중산층도 두터워졌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이 패턴은 다시 깨졌다. MIT의 Andrew McAfee와 Erik Brynjolfsson이 “Great Decoupling”이라고 부른 시기다. 생산성은 꾸준히 상승했지만, 고용률과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디지털 자동화는 생산직과 사무직 일자리를 동시에 압박했고,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마저도 고임금의 소수 전문직과 저임금 서비스 노동으로 양극단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고임금 일자리: 고학력이 필요한 분석적 작업.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데이터 과학자, 금융 분석가.
저임금 일자리: 개인 서비스 부문. 요양 보호사, 소매 판매원, 배달 기사.

즉, 기술 혁신이 일어날 때마다 중간층은 더 큰 규모로 사라진다.

The Ownership of Means of Production

1867년,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출간했다. 핵심 통찰은 단순하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생산수단은 공장이었다.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하고,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 중 일부만 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잉여가치)를 전유했다. 자본이 축적될수록 생산수단은 더욱 집중되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물론 자본론의 주장과는 다르게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고 국가자본주의로, 복지국가로, 신자유주의로 형태를 계속 바꾸며 살아남아왔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핵심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이 분배를 결정한다. 그리고 로봇 경제는 이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과거에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지만, 적어도 노동자는 필요했다. 공장을 돌리려면 노동자가 있어야 했다.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빼앗았지만, 노동자에게 임금은 지불했다. 긴장 관계 속에서도 일종의 균형이 있었다. 하지만 로봇 경제에서는 노동자가 아예 필요 없어질 수 있다. 자본가는 로봇을 소유하고, 로봇이 모든 가치를 창출한다. 이제 노동자는 노동력조차 팔 수 없다. 로봇이 더 싸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자동화는 자본 소득 비중을 증가시킨다. 자본은 소수가 소유한다. 따라서 누가 로봇을 소유하는가가 국부의 미래 분배를 결정한다." - IPPR

영국의 경우, 자동화 가능한 일자리의 임금 총액이 연간 2,900억 파운드로 전체의 1/3에 달한다. 이것이 노동에서 자본으로 이전되면? 제도적인 재분배 매커니즘이 동작하지 않는 한 불평등은 극적으로 심화될 수 밖에 없다.

일부 학자들은 우리가 "기술 봉건주의(techno-feudalism)"로 향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소수의 기술 귀족(로봇 소유주)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대다수는 그들에게 의존하는 구조. 중세 봉건제와 유사하지만, 영주가 아니라 테크 기업이 권력을 쥔다.

Redefining Poverty

로봇과 자동화가 폭발적으로 가치를 만들어내고, 국가나 그에 준하는 집단이 이 과실을 활용해 모두에게 ‘일하지 않아도 최소한은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을 보장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때 우리는 빈곤이 사라진 미래, 다시 말해 더 이상 누구도 굶주리거나 노숙하지 않는 사회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회에서 가난까지 함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빈곤은 주로 절대적 기준으로 정의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사회학자 찰스 부스는 최소한의 영양, 주거, 의복을 확보할 수 있는지, 즉 생존(subsistence)을 기준으로 빈곤을 측정했다. 오늘날 세계은행 역시 하루 2.15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절대적 빈곤층으로 분류한다. 1990년대 20억 명이 넘었던 이 수치는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 덕분에 7억 명 수준으로 줄었다. 로봇 경제까지 본격화되면 식량, 의복, 기본 주거 같은 재화는 한계비용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고, 이 정의에 따른 “절대적 빈곤”은 정말로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고, 가만히 상황이 흘러가게 두면 가난은 더 큰 규모로 인류를 덮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산업혁명과 디지털 자동화의 사례에서 보았듯, 생산성이 아무리 폭발해도 그 과실이 좁은 소유 계층에 집중되면, 다수의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불안정한 삶과 배제감뿐이었다. 로봇 경제가 같은 궤적을 따라간다면, 굶주림과 노숙은 줄어들지 몰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와 사회적 인정, 스스로 삶을 설계할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가난은 단지 소득의 부족이 아니라 역량(capability)의 박탈이다. 그래서 가난을 정의하려면 사람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소득은 그저 수단일 뿐이고, 진짜 목적은 건강하게 살고, 교육을 받고, 사회에 참여하며,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 즉 다양한 기능(functionings)을 실제로 이뤄내는 데 있다.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가난을 없앨 수 없다.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지 못한다. 공동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고, 중요한 의사 결정에서 배제되고, 기술과 제도가 특정 집단의 이해에 맞게 설계되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적 지위가 서서히 깎여 나가는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로봇 경제가 이런 구조 위에 세워진다면, 인류는 절대적 빈곤에서는 벗어나더라도, 상대적 박탈과 역량의 결핍이라는 의미에서의 가난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정말로 던져야 할 질문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이는 기술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이다. 분배 규칙과 소유 구조, 교육과 건강, 사회 참여의 권리를 어떻게 설계할지에 대한 정치적 선택과, 그 선택을 둘러싼 깊은 논의와 열린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 과정을 애써 피한다면, 로봇이 아무리 많은 빵을 구워도, 그 빵을 누가 어떻게 나눠 먹을지는 결국 소수의 손에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