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ed crisis. maybe
전쟁이 길어지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이 시작된 지 벌써 수 주가 흘렀고, 호르무즈 해협 봉쇄 리스크는 여전히 유가 위에 무겁게 얹혀 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입장에서, 이건 얼핏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상황이다.
미국 에너지 시장에는 매년 반복되는 계절적 리듬이 있다. 4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여름 드라이빙 시즌에는 하루 100만~150만 배럴씩 수요가 급증한다. 2022년 6월, 미국 평균 휘발유 가격이 역사상 처음으로 갤런당 $5.03을 돌파했을 때 바이든의 지지율은 바닥을 찍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여름 휘발유 가격이란 경제 지표가 아니라 정치적 생사의 바로미터다. 그런데 본격적인 유가가 시민들의 일상에 파고드는 5월까지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유가를 내리기는커녕 공급 쇼크를 스스로 만들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이다.
"유가 급등"이라는 모호한 세 글자에 매몰되면, 큰 그림을 보기 어렵다. 유가도 유가 나름이다. 전략적 비축유(SPR), 셰일 오일, 브렌트유, WTI, LNG 등 실제로 수많은 '유가'가 존재하며, 각기 다른 경로로 유입되고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의 본질은, 유가 공급의 핵심 병목인 호르무즈를 의도적으로 때려 긴장을 만든 뒤, 그 긴장이 만들어낸 여러 명분을 통해 다른 쪽의 밸브를 여는 것이다.
OPEC+ 8개국이 4월부터 하루 20만 6천 배럴 증산을 결정했고, IEA는 역대 최대 규모의 비축유 방출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바이든 정부 때부터 밀어왔던 친환경 정책을 빠르게 폐기하고, 셰일 기반 석유 증산에 대한 규제를 풀어줄 명분도 자연스럽게 생겼다. 중동 리스크가 이렇게 크니 당장 우리 앞마당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프레임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카드는 올해 1월 마두로 생포 작전으로 사실상 손에 넣은 베네수엘라다. 미국 정유 시설이 밀집한 걸프 연안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미국이 원하는 초중질유를 뿜어내며, 제재 완화의 틀도 이미 어느 정도 열려 있다. 이 모든 대체 공급 파이프라인이 동시에 가동되기 시작하면, 호르무즈 한 곳의 병목이 만들어낸 프리미엄은 빠르게 증발한다. 그리고 미국 시민들은 유가만 안정되면 트럼프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다. 곧이어 찾아올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은 덤이다.
사실 중동의 긴장이란 트럼프 이전부터 정교하게 관리되어 온 것이다. 카터 독트린 이래 미국은 반세기 넘게 이 지역의 긴장을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하며 자국의 에너지 안보와 지정학적 영향력을 동시에 관리해왔다. 트럼프가 하고 있는 일은 이 오래된 긴장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긴장의 설계도를 다시 그리는 것에 가깝다. 호르무즈라는 전통적 병목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서반구 공급망을 되살리며, 베네수엘라산 석유 증산이라는 새로운 축을 세우는 것. 위기를 통해 공급의 지형 자체를 재편하려는 것이다.
봄에 공포감으로 유가를 한껏 띄운 뒤, 사람들이 가장 기름값에 예민해지는 한여름에 대체 공급과 긴장 완화 신호를 동시에 터뜨려 꺾는다면, 유권자들이 느끼는 체감 하락폭은 절대적 가격과 무관하게 강력한 심리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결국 이번 이란 침공도 "설계된 위기"에 불과하다. 역사는 반복해서 같은 것을 보여준다. 서사를 지배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 위기의 원인을 만든 자가 그 위기의 해결자로 등장하는 구조, 이것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효과적인 권력의 문법이다. 어떻게 끝날지는 아직 모르지만, 트럼프가 하고 있는 일은 적어도 새로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