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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ding sp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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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ontent Pixie / Unsplash
"우리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인생은 충분히 길고 가장 위대한 일들을 이룰 만큼 넉넉히 주어졌으나, 그저 사치와 무관심으로 흘려보내고 이미 지나간 것을 깨달을 뿐이다." - 세네카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sein)'라 칭한다. 거기(Da)에 있음(Sein)이라는 뜻의 이 용어는 인간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 내던져져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끊임없이 기획해 나가는 역동적인 존재라는 의미다. 인간은 세계 안에서 타자들과 함께 존재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이 현존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자신'으로 살지 않고 '세인(Das Man)'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인은 그들이 즐기는 대로 즐기고, 그들이 보고 판단하는 대로 판단하며, 선택의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난다. 바쁨을 훈장처럼 여기는 Hustle Culture 사회에서 "바쁘게 사는 세인"은 더욱 많은 책임에서 면제된다. 정보의 홍수는 시간이 갈수록 그 밀도를 더할 뿐이니, 우리에게는 죽기 직전까지도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할 자극들이 충분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이 마주한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물음은 끝내 우리를 따라잡는다. 죽음을 앞당겨 생각하는 것은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바로 이 불안을 통해 각성이 온다. 불안은 세계의 의미 연관을 끊어내고 우리를 죽음이라는 절대적 무 앞에 세운다. 그리고 현재의 모든 선택은 절박함과 진정성을 획득한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고요히 마주해야 한다.

이 본래적 자아를 묻는 일은 나만의 고립된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애초에 "함께 있음"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어서, 타자 없이 혼자만으로 완성되는 존재는 상정될 수 없다. 나의 고유한 존재를 묻는 일은 결국 나의 존재를 만드는 가장 소중한 타자와 어떻게 존재하겠느냐의 의미이기도 하다. 내게 그 타자는 아내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아내와 저녁식사를 할까 말까 하는 지금의 삶이 나의 바쁨으로 정당화되어왔음을 반추하게 되었다. 1년에 겨우 52번 아내와 식사하는 삶은 80살 정도를 겨우 사는 인간의 수명을 고려했을 때 고작 2,600여 번만의 식사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나의 존재를 만들어주는 타자와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에 2,600번의 식사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밀려든다. 적어도 10,000번은 남아있어야 한다.

시간은 채워야 할 여백이 아니라 지켜야 할 영토라는 세네카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10,000 번의 식사시간은, 함께 온전히 존재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은 당연히 주어져있는 채움의 대상이 아닌 지켜내야 하는 수호의 대상이다.

이를 위해 바쁨의 자극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는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일찍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기로, 가급적 저녁식사는 아내와 함께 하기로, 퇴근 후에는 24시간 일만을 생각하는 전쟁 모드를 문밖에 두고 들어오기로 결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