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데미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물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한줄로 딱 떨어지는 명쾌한 대답이 기대되는 종류의 질문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사람이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방향을 찾으려면 먼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자기 삶 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판단하려 하면, 시선이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 돌아오는 것이다. 삶을 살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평가하려 하는 것. 지도 위에 현재 위치를 표시하려는데, 표시하는 손이 지도 위에 있는 셈이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동시에 삶을 온전히 내려다볼 수 없다.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다
영화를 주인공과 함께 이끌어가는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왜가리다. 그리고 이 왜가리는 영화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야."
"거짓말이야!"
"진실이야! 나야말로 잘 알지.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야."
왜가리의 말이 참이라면, 왜가리 자신도 거짓말쟁이가 되므로 이 말은 거짓이 된다. 거짓이라면, 왜가리는 진실을 말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다시 참이 된다. 참과 거짓 사이를 끝없이 진동하는 역설. 고전적인 거짓말쟁이의 역설이다. 이 역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모순덩어리 왜가리를 주인공을 안내하는 안내자로 세운다. 이 모순덩어리 안내자는 영화 내내 모순덩어리다. 겉모습은 위엄 있지만 안에는 못생긴 늙은이가 숨어 있다.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 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모순덩어리인 채로 길을 안내한다. 이는 마치 거짓말쟁이가 때로는 진실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안내자가 반드시 모순없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이 왜가리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 자신의 초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모순덩어리다. 비겁하면서 용감하고, 이기적이면서 헌신적이며, 거짓말쟁이이면서 진실을 향해 간다. 인간의 삶을 무모순적인 형식체계로 단순히 환원할 수 없는 이유다. 인간은 자기 안에 악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의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 모순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의 조건이다.
의도를 담는 그릇
그렇다면 이 모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가. 삶을 살면서 동시에 삶에 대해 물어야 하는 존재인 우리는 이 자기참조적 모순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물음으로써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묻는 행위는 기존의 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발현되는 모순이다. 왜가리 안에 못생긴 늙은이가 숨어 있었듯, 우리의 의도 안에도 악의가 숨어 있다. 선의를 향해 뻗는 손에 이기심이 묻어 있고, 용기 있는 결단의 이면에 허영이 서려 있으며, 헌신이라 믿었던 것의 밑바닥에 두려움이 깔려 있다. 우리는 순수한 의도를 가져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의도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요체다. 왜가리가 거짓말쟁이라는 이유로 안내를 거부했다면, 주인공은 끝내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모순 없는 완벽한 안내자를 기다렸다면, 영원히 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도의 순수함이 아니라, 불순한 의도라 할지라도 그것을 품고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도약(leap)"이라고 불렀다. 합리적 추론의 사다리가 끝나는 지점, 충분한 근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럼에도 결단하는 순간. 이 도약은 무모함이 아니라 모순이 해결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모순을 안은 채로 발을 떼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결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가 악한 것을 경계하지 말고 의도가 사라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의도가 사라진 자리에 최적화 논리가 들어서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악의가 섞인 의도는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의도가 없는 삶은 고칠 주체조차 남아 있지 않다.
금이 간 그릇, 악의가 묻은 그릇, 두려움이 스민 그릇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의도를 담아야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의미는 삶 이전에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삶 이후에 읽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첫 문장에서 결론을 알지 못하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비로소 자기 삶의 문장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 문장을 읽는 행위가 또 하나의 물음이 되고, 또 하나의 균열이 되고, 또 하나의 도약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마 이런 형태일 것이다.
-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계속 써지고 있는 문장.
- 증명이 아니라, 결단의 축적.
- 왜가리처럼 모순을 안고, 그럼에도 길을 가는 것. 내 안에 악의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의도를 가지고 살기로 택하는 것.
영화에서 탑 안의 세계는 악의 없는 적목으로 쌓아 올린, 무결한 의도의 세계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 무결함이 지배하는 세계의 끝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앵무새들의 세상이었다. 명령에 복종하고, 질문 없이 따르며, 자기 의지를 포기한 존재들. 순수한 의도로 설계된 체계가 결국 파시즘적 세계로 귀결된 것이다. 의도에서 악의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는, 의도 자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소년은 돌아간다. 악의가 있는 자신의 세계로.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가장 정직한 선택이다. 탑 안의 세계가 약속하는 무결함은, 삶이 아니라 삶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의도를 가지되 악의를 제거한 세계는, 결국 의도 없는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된다. 악한 의도라 할지라도 의도가 있는 세계, 모순투성이의 세계, 그러나 살아 있는 세계. 소년이 돌아간 것은 그 세계이다.
"위험한 곳에서 구원하는 것 또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