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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game

language game
Photo by Jr Korpa / Unsplash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 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앞으로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히 한 낱말로 표현될 것이고, 그 뜻은 엄격하게 제한되며 다른 보조적인 뜻은 제거되어 잊히게 될 걸세.

이미 우리는 제11판에서 그런 것에 주안점을 두었네. 하지만 그 과정은 자네나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될 걸세. 세월이 흐를수록 낱말 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의식의 폭도 좁아지게 되는 거지. 물론 지금도 사상죄를 범한 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유나 구실을 댈 수는 없네. 그것은 단지 자기 수양이나 현실 통제를 못한 탓이지.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는 것조차 필요 없게 될 걸세.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될 것이네. - 1984

"언어 게임(Sprachspiel)"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는 『철학적 탐구』(1953)에서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게임의 규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Water!"라는 단순한 외침 하나가 명령이 될 수도,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다른 형태의 소통이 될 수도 있다.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이 게임의 규칙 자체를 조작한다면 우리의 사고는 어떻게 변할까?

20세기는 언어 조작이 어떻게 대량 학살과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장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Newspeak,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분석한 나치의 언어 규칙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 이론이 현실화 되었을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Rules create meaning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단순한 기호의 집합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practice)과 삶의 맥락에 뿌리내린 활동으로 이해했다. 대표적인 예시인 건축가의 언어 게임은 이를 잘 드러낸다. 건축가 A가 “벽돌”, “기둥”, “판석”, “보”라는 네 단어만으로 조수 B에게 명령을 내리면, B는 각 단어를 듣고 해당 재료를 가져온다. 이처럼 언어는 일상적 실천과 명확한 규칙에 따라 사용될 때 그 의미가 결정된다. 어떤 단어든—설령 그 자체로는 단순해 보일지라도—그 단어가 쓰이는 규칙이나 맥락이 바뀌면 전혀 다른 뜻을 갖게 될 수 있다.

결국 단어는 그것이 속한 게임의 규칙, 즉 우리가 합의한 약속과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게임”이라는 단어 자체를 놓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보드게임, 카지노, 축구, 워게임 등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이 단어를 쓰지만, 각 경우마다 규칙이 다르고 따라서 의미 또한 달라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개념은, 곧 우리의 세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곧, 언어의 규칙과 경계가 우리의 사고의 틀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언어와 규칙, 의미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규칙이 바뀌면 우리가 인식하고 소통할 수 있는 세계 자체도 변한다.

Newspeak: If you reduce language, you also reduce thought.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오세아니아의 당이 창조한 언어, Newspeak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디스토피아적으로 구현했다. Newspeak의 목적은 명확했다:

"사고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

단순화된 문법과 제한된 어휘를 통해, 당은 시민들의 비판적 사고 능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오웰은 1946년 "정치와 영어"라는 에세이에서 이미 이를 경고한 바 있다. "만약 사고가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사고를 타락시킬 수 있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어가 독재 정권 하에서 어떻게 퇴화했는지를 지적하면서, 그는 언어의 쇠퇴가 지적 능력의 쇠퇴와 직결된다고 주장했다. Newspeak은 이 관찰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다.

Newspeak의 작동 원리는 교묘하다. "bad"라는 단어를 없애고 "ungood"으로 대체한다. "very good"은 "plusgood", "wonderful"은 "doubleplusgood"이 된다. 이렇게 하면 반대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환원된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라는 단어다. Newspeak에서 "free"는 오직 "이 차는 벼룩이 없다(This dog is free from lice)"처럼 물리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다. "지적으로 자유롭다", "정치적으로 자유롭다"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Newspeak에서는 약어의 사용도 중요하다. Ministry of Truth는 Minitrue, Records Department는 Recdep이 된다. 오웰은 이것이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Comintern"은 거의 생각 없이 발음할 수 있지만, "Communist International"은 잠시 멈춰서 생각하게 만든다. 약어는 연상을 좁히고 통제 가능하게 만든다. 나치의 "Nazi", "Gestapo", 소련의 "Politburo", "Agitprop" 같은 약어들이 20세기 초반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널리 퍼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Nazi language rules: Turning evil into bureaucratic routine.

한나 아렌트는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참관하면서, "악의 평범함(the banality of evil)."에 대해 기술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승진을 원하는 평범한 관료였다. 그리고 그가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보낸 것은 나치가 만든 언어 게임 안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비록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 재판대에서 한 행동은 완전히 연기된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지만)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의 "언어 규칙(Sprachregelungen)"을 상세히 분석한다. 최종 해결과 관련된 모든 서신은 엄격한 언어 규칙의 적용을 받았다. 특수 작전부대의 보고서를 제외하고는, "말살(extermination)", "청산(liquidation)", "살인(killing)" 같은 노골적인 단어가 나오는 문서를 찾기 어렵다.

한 고위 외무부 관리는 바티칸과의 모든 서신에서 유대인 살해를 "근본적 해결(radical solution)"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교묘한 언어 유희였다. 나치 관점에서 슬로바키아의 가톨릭 괴뢰 정권은 세례받은 유대인을 제외한 반유대주의 입법에서 "충분히 근본적"이지 않았고, "근본적 오류"를 범했다. 따라서 "근본적 해결"이라는 말은 바티칸에 완전한 말살을 의미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비밀의 소지자들(bearers of secrets)" 사이에서만 암호화되지 않은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속기사와 다른 사무 직원 앞에서는 일상적인 살인 업무 수행 중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언어 규칙들은 여러 이유로 고안되었겠지만, 그것들은 이 문제에 협력이 필수적이었던 다양한 부서들의 질서와 정신적 온전함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이 언어 체계의 순효과는 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들의 오래된 '정상적인' 살인과 거짓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언어 규칙 자체가 코드명이었다. 그것은 "지시(directive)"를 의미했다. 살인자들조차 자신들이 살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정착(resettlement)", "특별 대우(special treatment)", "최종 해결"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양심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주변의 "존경받는 사회"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What language manipulation makes possible

20세기는 언어 게임이 어떻게 조작되고, 그것이 어떤 파국적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문제(problem)"였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solution)"이 필요했다. 언어가 관료적이고 기술적이 될수록, 도덕적 판단은 더욱 마비되었다.

소련에서는 "인민의 적(enemy of the people)"이라는 개념이 수백만 명을 수용소로 보낼 수 있게 만들었다. 누구든 이 범주에 속하면, 그는 더 이상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동안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언어 게임의 일부였다.

더 최근에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강화된 심문 기법(enhanced interrogation techniques)", "정권 교체(regime change)" 같은 완곡어법들이 전쟁의 현실을 가린다. 아렌트가 나치의 언어 규칙에 대해 한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어의 목적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정상적인 도덕적 지식과 연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은 마을을 파괴하는 것을 "평정(pacification)"이라고 불렀다. 이라크 전쟁에서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는 대량 폭격의 완곡어법이었다. 기업 세계에서는 해고를 "규모 조정(downsizing)", "구조조정(restructuring)", "인력 최적화(workforce optimization)"라고 부른다. 언어가 중립적이고 기술적으로 보일수록, 그것이 가리키는 인간적 고통은 더 보이지 않게 된다.

Modern Languages Games

21세기에 언어 게임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했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언어를 결정한다. 자동완성 기능은 우리의 사고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한다. 검색 엔진 최적화(SEO)는 어떤 단어가 가시성을 갖는지를 결정한다.

인공지능 언어 모델은 수조 개의 텍스트로 훈련되어, 특정한 언어 패턴을 재생산한다. 이 모델들이 편향된 데이터로 훈련되면, 그 편향을 증폭시킨다. "불법 이민자(illegal immigrant)" 대신 "서류미비 이민자(undocumented immigrant)"를 사용하는 것, "기후 변화(climate change)" 대신 "기후 위기(climate crisis)"를 사용하는 것—이런 선택들은 우리가 문제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정치적 양극화는 부분적으로 언어 게임의 분리에서 비롯된다. 진보와 보수는 점점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같은 단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자유(freedom)", "정의(justice)", "평등(equality)"—이런 단어들은 서로 다른 언어 게임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한다. 언어 게임이 다르면,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 교묘한 것은 기업들과 정부가 사용하는 "중립적" 언어다. "고객 경험 최적화"는 사용자 데이터 수집을 의미한다. "규제 완화"는 종종 기업의 책임 감소를 의미한다. "전략적 재배치"는 군사적 철수를 의미한다. 이런 언어들은 나치의 Sprachregelungen만큼 직접적으로 폭력적이지는 않지만, 같은 메커니즘을 사용한다. 현실을 추상화하고, 도덕적 판단을 기술적 결정으로 대체하는 것.

To show the fly the way out of the fly-bottle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역할을 "파리에게 파리병 밖으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언어 게임에 갇혀 있지만, 우리가 게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반항을 상상할 수 있다.

오웰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Newspeak이 완전히 구현되기 전의 세계에 살았다. 그는 여전히 Oldspeak(표준 영어)를 기억하고, 그것을 통해 생각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반란을 상상할 수 있었던 이유다.

언어 게임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저항의 첫 단계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 우리에게 강요되는 언어 규칙들, 우리의 담론을 형성하는 완곡어법들, 이것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장의 자유"라고 할 때, 누구의 자유를 말하는가? "국가 안보"라고 할 때, 무엇을 희생하는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언어 게임이 없이 살 수 없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모르는 채로 하는데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어 게임에 대한 메타 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