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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s on free-trade era

reflections on free-trade era
Photo by CHUTTERSNAP / Unsplash
"위기(crisis)"의 어원은 그리스어 "krinein"으로 상황에 대한 판단, 의사결정, 구분을 뜻한다. 즉 위기의 본래 뜻은 "사리를 분간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트럼프발 관세 위기가 거세다. 높은 관세는 20세기 후반부터 글로벌화를 지탱했던 자유무역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며, 자유무역 시대를 주도했던 미국이 세운 관세 장벽은 단순히 미국 자국주의의 프레임을 넘어 자유 무역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 본다.

자유무역의 모순과 미국

20세기 후반부터 글로벌화를 지탱했던 자유무역 시대는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 이론에 기반하여 각 국가가 가장 효율적인 분야에 특화되도록 유도했다. 이는 각자가 잘 하는 부분에 집중하고, 부족한 부분은 아웃소싱하여 생산함으로써 글로벌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지금의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 체제는 미국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데,

  1. 생산 및 제조를 해외에 위탁하기 때문에 자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플랫폼 경제로 대표되는 서비스업과 금융업만 발전하는 취약한 산업구조를 가진 국가가 되어간다는 것과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자유무역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과잉 생산을 흡수하기 위해 미국의 소비 시장이 여전히 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자유무역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과잉생산을 다 받아내는 미국이 계속해서 성장하며 소비력을 유지하거나 키워주어야 하는데, 그 미국이 지금 체제에서 자국 생산력과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적자와 부채가 쌓여 허덕이고 있다.

자유무역과 글로벌화는 효율성을 추구하며 세계를 연결했지만, 그 대가로 플랫폼 경제의 과도한 팽창과 서비스업(금융업, IT)에 치우친 발전, 그리고 자국 제조업의 쇠퇴를 초래했다. 자유무역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 미국 제조업 일자리는 500만 개 이상 사라졌고, 7만 개 이상의 공장이 폐쇄되었다. 미국 경제가 '비트(bit)의 세계'에 치중하며 '물건(stuff)의 영역'을 포기한 탓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애플과 나이키를 들 수 있다. 애플은 아이폰 생산의 대부분을 중국의 폭스콘 공장에 의존해왔으며, 나이키 역시 신발 생산의 50%를 베트남, 18%를 중국, 27%를 인도네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본사에서는 제조 공정이나 물류 대신 브랜딩과 마케팅에 집중한다.

자유무역 체제에서 애플과 나이키의 이 커다란 성공은 곧 미국 기업의 성공 방정식이 되었다. 이제는 미국 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애플과 나이키의 방식을 따라해 원가를 절감하고 브랜딩과 마케팅을 통해 소비자와의 접촉을 늘려 영업이익을 올린다. 이러한 아웃소싱은 기업 입장에서는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지만 장기적으로 미국 내 제조 기반을 약화시키고, 핵심 제조 역량을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의 기업들이 위와 같은 방정식으로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무역적자를 통해 세계의 모든 수요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미국은 자신의 힘으로 생산할 수 없는 국가가 되어온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시리즈에 등장하는 트랜터 제국처럼, 이 구조는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다. 트랜터는 지구보다 표면적이 40% 작은 행성이지만, 전체가 하나의 거대 도시로 뒤덮인 세계다. 은하계의 중심으로서 모든 자원을 외부에서 수입하며, 자체 생산 능력을 상실한 채 지배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 의존성은 붕괴의 씨앗이 된다. 제국이 쇠퇴할 때 트랜터는 자원 부족으로 무너지며, 문명의 암흑기를 초래한다. 현실의 미국도 마찬가지다. 글로벌화가 제조업 쇠퇴를 부추기며, 트랜터처럼 '모든 것을 소비하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상태로 이끌었다. 미국은 지금 트랜터가 되어버렸다.

planet trantor from "foundation" https://asimovuniverse.fandom.com/wiki

중국의 모순

중국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구조를 인식하고 준비해온 것 같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 즉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는 철학 아래 1980년대부터 미국의 제조 공장을 자처하며 기술 노하우를 비롯해 산업 생태계를 통째로 흡수해왔다. 현재 중국의 경제규모와 산업구조,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해온 기술 경쟁력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중국 역시 같은 모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시진핑의 집권 아래 중국이 추구하는 것도 결국 미국과 같은 소비 중심 경제다. 내수 확대를 통한 경제성장,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육성 등 중국의 정책 방향은 미국이 걸어온 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중국이 미국의 모순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무역 적자국이 아니다. 세계에는 미국 역할을 할 수 있는 소비자가 단 하나뿐이다. 현재의 자유무역 체제에서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 새로운 미국이 되려면 중국이 모든 소비를 흡수하여 무역 적자국이 되고, 그만큼 해외 자본을 흡수하는 대신 누군가 다른 나라가 '중국 역할'을 해야 한다. 현 시점 세계 최대 무역 흑자국인 중국은 무역적자를 버텨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과거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줄 생산 기지를 찾아야 한다.

자급자족 시대와 느슨한 연결 고리

트럼프발 관세 전쟁은 이러한 흐름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위협의 프레임이나 보호무역주의가 아니라 현 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를 던진 것이다. 미국은 재산업화가 필요하며, 재산업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관세는 시간을 벌기 위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 중 하나인 것이다. 미국이 재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지금의 무역 적자를 감당하기 못하고 자체적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현재의 미국은 지금의 구조를 국가 위기 상황으로 정의하고 재산업화를 통한 자국 경쟁력 확보를 국가 최우선순위로 두고 있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금 향후 1~2년동안 미국이 정말 재산업화에 성공해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연장될 것인지, 아니면 결국 붕괴하여 긴 기간 이어질 혼란의 시대가 도래할 것인지의 변곡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안티프래질의 교훈은 단일한 시스템에 의존하는 생태계는 프래질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경제나 산업 구조에도 적용되는 교훈이다. 하나의 국가나 시스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는 결국 그 취약점으로 인해 붕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 붕괴를 목격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 체제의 붕괴는 새로운 체제의 탄생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새로운 질서의 탄생도 함께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