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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tegic surrender of blackrock

strategic surrender of blackrock

역사적으로 금융 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파산 소식이 일상처럼 느껴질 때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무너질 때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2026년 초 블랙록 TCP 캐피털(TCPC)이 순자산가치의 19%를 날렸다고 발표했을 때 시장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또 하나의 사모 대출 펀드가 망했군." 그러나 이 담담함의 이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내러티브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2026년 1월 23일 금요일, 장 마감 후 조용히 제출된 8-K 보고서. 주당 $8.71이던 순자산가치가 $7.05로 추락했다는 숫자. 전체 포트폴리오 149개 기업 중 단 6개가 손실의 67%를 차지했다는 설명. 표면적으로는 포트폴리오 관리의 실패, 운이 나빴던 투자의 청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블랙록의 전략적 투항(Strategic Capitulation)으로 보아야 한다.

The Anatomy of a Calculated Collapse

TCPC의 8-K 공시를 뜯어보면 몇 가지 수상한 패턴이 드러난다. 순 규제 레버리지가 1.20배에서 1.45배로 치솟았다는 것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BDC(사업개발회사)에게 1.45배 레버리지는 일종의 '데스 존'이다. 추가 차입이 불가능해지고, 신규 투자를 중단해야 하며, 보유 자산을 팔아 비율을 낮춰야 하는 강제적 디레버리징 상황에 내몰린다.

TCPC의 주가 추이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블랙록 같은 거대 운용사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손을 놓고 있었을까? 레노버 홈 파트너스(Renovo Home Partners)는 2025년 4월부터 이자를 현금 대신 주식으로 갚는 PIK 모드였고, 10월에는 Chapter 7 청산 파산을 신청했다. 그런데도 9월 30일 기준 분기 보고서에서는 이 대출 채권을 여전히 액면가 수준으로 평가했다. 11월 초에 완전히 망한 회사를 9월 말까지 '정상'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사모 펀드 업계의 관행인 "연장하고 숨기기(Extend and Pretend)"의 극한이다. 운용사는 스폰서가 추가 자금을 투입해 회사를 살려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근거로 감액을 미뤄왔고, 스폰서가 손을 떼는 순간 밸류에이션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문제는 블랙록이 이 "추락의 시점"을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The Toxic Six: A Vintage of Illusions

손실의 67%를 차지하는 이른바 "유독성 6개사"의 명단을 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레노버 홈 파트너스, 셀러X, 레이저 그룹, 에드멘텀, 하일란, 인모비. 이들은 모두 2020~2021년, 제로금리(ZIRP) 시대에 태어난 기업들이다.

레노버는 전형적인 '바이 앤 빌드' 전략의 산물이었다. 파편화된 주택 개조 업체들을 인수해 거대 플랫폼으로 키운다는 구상. 저금리를 활용한 소비자 금융과 팬데믹 기간의 인테리어 수요가 만나 완벽해 보이는 투자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금리 인상은 이 모델의 양쪽 날개를 모두 꺾었다. 소비자 대출 금리가 10%를 넘어가자 수요가 급감했고, 인플레이션으로 마진이 축소되었다.

셀러X와 레이저 그룹은 더 극단적인 사례다. 이들의 사업 모델은 금융 공학에 가까웠다. 아마존에서 잘 팔리는 소형 브랜드를 EBITDA 3~4배에 인수해, 자신들의 플랫폼(EBITDA 15배 평가)에 편입시키는 '멀티플 차익거래'. 저금리가 이 마법을 가능하게 했고, 고금리가 그 마법을 풀어버렸다. 이들을 지탱하던 저금리 대출이 리파이낸싱 시점에 고금리 폭탄으로 돌아온 것이다.

결국 TCPC의 대규모 상각은 개별 기업의 불운이 아니라, 특정 시대(ZIRP)에 집행된 특정 전략(레버리지 기반 성장)의 구조적 실패에 대한 사망 선고다. 그리고 블랙록은 이 선고의 시점을 직접 선택했다.

The Regulatory Storm: Why Now?

블랙록이 2026년 1월에 모든 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낸 배경에는 워싱턴과 뉴욕에서 불어오는 규제의 폭풍이 있다.

뉴욕 남부지검(SDNY)은 월가의 저승사자로 불린다. 흥미롭게도 전 SEC 위원장이었던 제이 클레이튼이 SDNY 연방검사로서 사모 시장에 칼을 빼 들었다. 핵심 쟁점은 사모 펀드들이 자산 가치를 부풀려 평가함으로써 관리 보수를 부당하게 수취하고 투자자를 기만했는지 여부다. 2025년 말, 서브프라임 오토 대출 업체 트리컬러의 경영진이 데이터 조작 혐의로 기소된 것은 검찰의 인내심이 바닥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도 신용평가사들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사모 대출 펀드들이 엄격한 대형 평가사(무디스, S&P) 대신 더 후한 등급을 매겨주는 중소형 평가사(KBRA, 이건-존스)로 몰려간 '등급 쇼핑' 관행이 타깃이다. 워런은 이를 2008년 금융위기 직전의 모기지 등급 인플레이션과 동일시하고 있다.

블랙록 입장에서는 검찰 조사가 본격화되기 전에 장부상의 거품을 스스로 제거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을 것이다. 레노버와 같은 좀비 기업을 계속 액면가로 평가하다가 적발될 경우, 단순한 손실을 넘어 회계 부정 혐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점에 '키친 싱크(Kitchen Sink)'를 단행한 첫 번째 이유다.

The Hidden Card: NAV-Below Issuance

그러나 규제 압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왜 블랙록은 단순히 손실을 인식하는 것을 넘어, 레버리지를 규제 한도 이상으로 폭등시키는 극단적인 상각을 단행했을까?

2025년 6월, TCPC는 주주총회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회사의 주식을 순자산가치(NAV) 미만의 가격으로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승인받은 것이다. BDC는 법적으로 주주 승인 없이는 NAV 아래로 신주를 발행할 수 없다. 기존 주주들의 지분 가치가 즉각적으로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랙록은 왜 이 고통스러운 권한을 미리 확보해 두었을까?

현재 TCPC의 주가는 NAV($7.05)보다 훨씬 낮은 $5~6 수준에서 거래될 것이다. 블랙록은 이 권한을 이용해 $5.50 정도의 가격에 대규모 유상증자를 단행할 수 있다. 기존 주주들은 앉아서 지분율과 주당 가치를 갉아먹힌다.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현금이 들어온다. 이 현금으로 1.74배까지 치솟은 레버리지를 낮추고, 헐값에 나온 시장의 매물들을 주워 담을 수 있다.

2026년 1월의 대규모 상각은 이 유상증자를 위한 '명분'을 완성한다. NAV를 19% 떨어뜨리고 레버리지를 규제 한도 이상으로 폭등시킴으로써, "지금 당장 자본을 확충하지 않으면 회사가 위험하다"는 위기감을 조성한다. 모든 부실을 2025년 장부에 털어버림으로써 2026년부터는 깨끗한 장부로 새 출발할 수 있다. 그리고 2025년 6월에 받아둔 권한의 만료가 2026년 6월이다. 지금이 아니면 그 카드를 쓸 수 없다.

The Predator's Calculation: Dislocation as Opportunity

블랙록은 노련하다. 그들은 위기를 쉽게 낭비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기회'는 항상 '혼란(Dislocation)' 속에 있다. 블랙록의 2026년 전망 보고서들은 일제히 시장 혼란, 부실 채권, 특수 상황에서의 기회를 강조하고 있다.

규제 당국이 중소형 신용평가사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존에 투자 적격 판정을 받았던 수많은 사모 대출 자산들이 투기 등급으로 강등된다. 등급이 강등되면 이 자산을 들고 있던 보험사나 연기금은 내부 규정에 의해 자산을 강제로 팔아야 한다. 시장에 매물이 쏟아지지만 받아줄 곳은 없다. 가격은 폭락한다.

블랙록은 이 시나리오를 정확히 읽고 있다. KBRA가 A등급을 줬던, 하지만 무디스가 평가를 거부했던 대출 채권들이 시장에 50~60센트에 나올 것이다. 전통 금융의 거인인 블랙록은 이 상황을 기다려왔다. "듣보잡 운용사들이 엉터리 신용평가사와 결탁해 만든 거품이 터지면, 우리가 들어가서 진짜 가격을 매겨주겠다." 이것이 블랙록의 속내다.

TCPC가 주주 가치를 희석하면서까지 돈을 끌어모으려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줍줍(Bottom Fishing)'을 위한 실탄 마련이다. 레버리지를 낮춰 규제 요건을 맞추는 것은 생존을 위한 최소 조건이고, 진짜 목표는 확보된 현금으로 경쟁자들의 우량 자산을 헐값에 인수하는 것이다.

The Sacrifice and the Rotation

이 전략에서 기존 주주, 특히 개인 투자자들은 희생양이다. 그들은 과거 고점($12~$14)에 들어와서 현재의 바닥을 경험하고 있다. 반면, 이번 유상증자에 참여할 새로운 주주들(대형 기관, 또는 블랙록의 다른 펀드들)은 바닥 가격에 진입하여 향후 시장 회복의 과실을 독차지할 것이다.

이것이 월가가 개인 투자자를 다루는 방식이다. "파산 반영"이라는 공포를 통해 기존 주주를 털어내고(Capitulation), 그 자리에 스마트 머니를 채워 넣는 거대한 손바뀜(Rotation)이 일어나고 있다. 2026년 1월의 8-K 공시는 단순한 실적 발표가 아니라, 기존 주주들에게 보내는 최후통첩으로 이해해야 한다.

Reading the Narrative Behind the Numbers

금융 시장의 뉴스를 읽을 때 우리는 종종 숫자에 매몰된다. 19% 손실, 1.45배 레버리지, 6개 기업의 파산. 하지만 숫자는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다. 진짜 이야기는 그 숫자들이 왜, 언제, 어떻게 공개되었는지에 있다.

블랙록의 이번 행보가 보여주는 것은 대형 운용사들이 위기를 단순히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규제 압박이 거세지기 전에 스스로 부실을 인정하고, 미리 확보해 둔 권한을 활용해 자본을 재편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장의 혼란을 기회로 삼는다. 기존 주주의 희생 위에 새로운 자본의 이익이 쌓인다.

다가올 몇 달 안에 TCPC가 단행할 유상증자나 권리주 발행 공시가 뜰 것이다. 그때가 바로 블랙록이 설계한 큰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파산 소식이지만, 준비된 자본에게는 10년 만에 찾아온 가장 거대한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단지 그 문을 여는 열쇠가 기존 주주들의 눈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