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resort of the system
항복(surrender)이라는 단어에는 치욕의 뉘앙스가 배어 있지만, 모든 항복이 패배는 아니다. 조건부 항복(conditional surrender)은 성문을 열어주되 내성(內城)은 지키는 전략이다. 줄 것은 주되, 지킬 것은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2025년 12월 FOMC에서 파월이 한 일이 정확히 그것이다. 파월은 시장이 그토록 원하던 월 400억 달러 규모의 단기 국채 매입을 통해 유동성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금리 레벨이라는 내성만큼은 끝까지 내주지 않았다.
"The fed funds rate is now within a broad range of estimates of its neutral value."
- Jerome Powell
금리를 25bp 인하하여 3.50%~3.75% 구간으로 낮추면서도, 그는 이것이 "중립 금리 수준에 근접했다"고 못 박았다. 번역하면 이렇다. 돈은 풀어주겠지만, 과거와 같은 제로 금리나 초저금리 시대로의 복귀는 꿈도 꾸지 말라. 이것은 패배한 장수의 비굴함이 아니라, 물러나는 사령관이 방어선을 재구축하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The Trap Dressed as a Number
경제학 교과서에서 중립 금리(neutral rate)란 경제를 과열시키지도 냉각시키지도 않는 이론적인 금리 수준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경제학에서 중립 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 지표에 가깝다. 누구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 이 숫자를, 파월은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도구로 활용했다.
과거 연준은 중립 금리를 2.5% 수준으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이번 회의를 통해 파월과 연준 위원들은 이 추정치를 사실상 3.0%~3.5% 수준으로 상향 조정했다. 이렇게 현재의 중립금리를 조정한 순간, 지금의 금리는 경제를 옥죄는 긴축적 수준이 아니라 딱 적당한 정상적 수준이라는 논리가 완성된다.
트럼프가 임명할 차기 연준 의장이 취임 후 금리를 2%대로 급격히 낮추려 한다면, 그는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내린다는 명분을 내세워야 한다. 인플레이션이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부양적 통화정책을 쓰는 것은 인플레 재발의 책임을 온전히 뒤집어쓰는 행위다.
파월은 "경제학적으로 계산해보니 여기가 바닥"이라고 선을 그어버림으로써, 후임자가 금리를 더 내리려면 나는 경제학을 무시하고 트럼프의 명령을 따르는 정치꾼이라고 자인하게 만드는 수갑을 채운 것이다.
The Soul That Money Cannot Buy
파월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는 월가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 출신의 부유한 자산가다. 트럼프는 파월을 압박하면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세계관에서 모든 사람은 이익과 공포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월은 가질 것을 다 가진 슈퍼 리치다. 연준 의장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이 그에게 생계의 위협이 되지 않으며, 퇴임 후 월가에서 한 자리 얻는 것도 큰 유인이 아니다. 파월을 움직이는 동기는 소명 의식이다. 그는 자신이 기축통화 달러의 신뢰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월가의 DNA는 오늘 벌 수 있다면 내일 지구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상인의 기회주의다. 그러나 파월의 DNA는 내일 지구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오늘 욕을 먹겠다는 수호자의 원칙주의다. 미국 동부의 전통적인 엘리트 관료주의, 이른바 WASP 정신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들에게 공직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지탱하는 성스러운 의무(Noblesse Oblige)다.
파월은 자신이 무너지면 달러의 신뢰라는 제방이 무너지고, 결국 미국이라는 제국이 남미형 인플레 국가로 전락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트럼프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연준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홀로 둑을 막고 서 있다.
The Liquidity Magic: From December to April
파월의 입은 매서웠지만, 손은 따뜻했다. 2025년 12월 12일부터 시작된 연준의 준비금 관리 매입은 시장에 강력한 유동성 모멘텀을 제공하고 있다.
연준은 이번 조치를 양적완화(QE)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단순히 은행 준비금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기술적 조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시장 참여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칭이 아니라 유동성의 총량이다. 연준이 매달 400억 달러 규모의 단기 국채를 시장에서 사들이면, 국채를 매도한 기관들의 계좌에는 현금이 꽂힌다. 넘쳐나는 현금을 쥐게 된 기관들은 수익률을 쫓아 더 위험한 자산으로 이동한다.
이는 사실상의 스텔스 QE(Stealth QE)다. 경제 성장을 위한 영양제라기보다는, 고금리와 국채 발행 급증으로 인한 고통을 잊게 해주는 마약성 진통제에 가깝다. 이러한 유동성 환경에서는 시장의 반응 함수가 왜곡된다. 지표가 나쁘면 연준이 유동성을 더 풀 것이라 기대하며 주식을 사고, 지표가 좋으면 골디락스 경제라며 기업 실적 호조를 기대하며 주식을 산다.
그러나 파티에는 명확한 종료 시각이 정해져 있다. 2026년 4월, 미국의 세금 납부 시즌이다. 기업과 개인들이 세금을 내기 위해 은행 예금을 인출하여 재무부 계좌로 이체하면, 시중의 돈이 재무부의 곳간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은행 지준이 급감한다. 연준은 이번 T-bill 매입이 4월 세금 시즌 대비용이라고 명시했다. 4월이 지나면 매입을 중단하거나 축소할 가능성이 높다.
The Trump Card on the Table
시장은 파월의 중립 금리 경고를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더 강력한 패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경제 정책은 통화 정책의 제약을 뛰어넘는 성장 드라이브를 예고하고 있다.
파월의 임기는 2026년 5월에 끝난다. 트럼프는 이미 차기 연준 의장으로 자신의 경제 철학을 공유하는 인물을 물색 중이며, 케빈 해싯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그는 공급 중시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 신봉자다. AI 혁명과 규제 완화가 생산성을 높여 인플레이션 없이도 저금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월이 설정한 중립 금리 3.5%가 지나치게 높다고 비판하며, 취임 즉시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하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시장은 이를 해싯 풋(Hassett Put)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파월이 물러나면 연준은 결국 백악관의 출장소로 전락할 것이며, 성장과 주가 부양을 위해 돈을 풀 것이라는 믿음이다. 금리보다 더 즉각적이고 강력한 호재는 트럼프의 규제 완화다. 환경 규제 철폐와 화석 연료 생산 장려, 바젤 III 등 은행 자본 규제의 완화, 친크립토 정책까지. 시장은 이제 연준 풋 대신 트럼프 풋을 믿는다.
역사적으로 중앙은행과 정부가 싸우면 결국 정부가 이겼다. 중앙은행은 국채 금리가 폭등해 정부가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국 국채를 사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스텔스 QE도 사실상 이러한 재정 우위에 굴복한 첫 단계다.
History Rhymes
파월은 이미 패배가 예정되어 있는 전쟁에서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 중립 금리라는 덫을 놓았다.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무색하게도 시장은 그 덫을 비웃으며 트럼프가 주도하는 유동성과 성장의 파티장으로 달릴 가능성이 높다.
전형적인 제국의 말기적 현상이다. 빚으로 빚을 막고, 성장률 수치를 위해 돈을 푸는 것. 세계주의와 중앙은행 중심의 제도권 금융은 어차피 끝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파월의 반격에 얼마간 변동성이 이어지겠지만, 큰 흐름은 이미 정해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