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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fference

indifference
Photo by Ant Rozetsky / Unsplash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 Ernest Hemingway, 『The Old Man and the Sea』

얼마 전 미국에 다녀왔다. 미국은 한국에서 느끼기 어려운 "세계의 무심함"에 대한 세밀한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이 넓은 땅에서는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고,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누구도 관심이 없다. 혹자는 이 무심함에서 그러니 살아 무엇하나 하는 결론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실제로 경험했던 것은 오히려 이 짧은 생 동안 무엇이든 할 수 있겠구나, 무엇이든 해도 되는구나 하는 열정으로의 강렬한 끓어오름이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사형을 앞두고,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밤 앞에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심함(la tendre indifférence du monde)"에 마음을 열었다. 세계가 나에게 무심하다는 것은 세계가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따금씩 죽음을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접하곤 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바다를 향해 조금이라도 파도가 몰아치면 뒤집어질 것 같은 카약을 타고 바다 표면에 접해 3~4마일 정도 나가면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감히 나를 둘러싼 자연과 힘겨루기를 한다는 반항의 감각. 나를 둘러싼 모든 맥락이 지워지고 이 거대한 바다에 나 혼자 남겨져 있다는 고독의 감각. 여기서 배가 뒤집혀 죽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막거나 구해줄 수 없다는 공포의 감각이, 배 옆을 이따금 스치며 안으로 넘어오는 파도보다도 가까이 있었다.

The Man and the Sea(in Santa Cruz)

비바람이 몰아치고 극한의 파도가 덮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가 느꼈을 그 생생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바다는 산티아고에게 무심했고, 그 무심함 앞에서 노를 놓지 않는 것만이 그의 몫이었다. 맞바람 부는 파도 앞에 노를 저으며, 감히 운명에 저항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잠깐이나마 맛보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감각인가.


한국은 너무 안전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너무 위험하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1882)에서 존재로부터 가장 큰 결실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두는 비밀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고 썼다.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 도시를 세우라, 미지의 바다로 배를 보내라. 우리는 오래도록 그 반대의 처방을 따라왔다. 자신을 던질 줄 모르고, 자신을 둘러싼 운명에 저항하기는커녕 그것을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죽는 일은 너무나 호들갑스러운 일이고, 조금이라도 다쳐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안전하게 자라야 한다. 이 환경이 어쩌면 우리 삶의 열정을 꺼뜨리는 요소가 아닌가 한다.

밀폐된 상자 안에 안전하게 켜져 있는 촛불은 상자 안의 산소가 다하면 힘없이 꺼지게 마련이다. 바람은 불꽃을 꺼뜨리기도 하지만, 불꽃을 살려두는 것을 실어 오는 것도 바람이다. 세계의 무심함이란 그런 바람일 것이다. 꺼질 바에는, 나를 향해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더 활활 타오르려다 꺼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