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mythe de sisyphe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두 항의 관계로 정의한다. 인간의 "통일성과 명료성에 대한 향수(nostalgie d'unité)"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silence déraisonnable du monde)" 사이의 충돌. 부조리는 둘 중 어느 항에도 내재해 있지 않다. 둘 사이의 어긋남으로만 존재한다.
카뮈는 이 어긋남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셋으로 나눈다.
- 의미를 갈망하는 자기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관계 자체를 폐기하는 자살
- 세계의 침묵을 부정하고 인위적 의미 체계로 그것을 덮는 도약(saut)
- 그리고 두 항을 그대로 둔 채 부조리를 명료하게 의식하며 살아내는 반항(révolte).
카뮈의 정의에 따르면, 부조리를 발견한 자. 즉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로 태어나 침묵하는 세계를 맞닥뜨린 인간에게 가장 논리적인 결론은 자살인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뮈는 이에 대한 대답으로 "반항"을 선택한다. 이는 일종의 논리적 도약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선택의 근거가 부조리 자체에서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결정을 어디선가 가져온 것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적 가르침은 세계의 침묵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부조리에 대응한다. 즉 "도약"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세계가 신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룰루 밀러의『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인물 "그린 스타 조던"은 평생을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데 바침으로써 세계의 침묵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이념으로 굳어질 때 역사적으로 큰 문제를 가져오곤 했다. 카뮈 자신도 도약의 방식이 사회적으로 뻗어나갈 때 가져올 문제들에 대해『반항하는 인간』에서 지적한 바 있다. 20세기 공산주의와 파시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우생학 운동은 모두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들겠다"는 갈망이 정치화된 결과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자연의 혼돈에 라벨을 붙여 의미를 부여하려던 분류학자가 결국 인간 사회에도 같은 충동을 적용해 미국 강제 단종법의 핵심 인물이 된다. 종교전쟁도 같은 구조다. 세계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신앙이 타인의 침묵까지 의미로 채우려 할 때, 분류와 배제가 시작된다.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그리고 비극의 탄생과 위버멘쉬를 읽으면서 태어날 때부터 믿어온 기독교 신앙을 분해하고 조립하기를 거듭하게 되었다.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대해 나는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결론으로 기독교 신앙을 두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하나는 "설명하는 신앙", 모든 사건에 신의 뜻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명제적 신앙이다. 이는 이는 카뮈가 키에르케고르를 향해 휘두른 칼에 정확히 베인다. 부조리를 사다리 삼아 신에게 올라가는 동작, 그가 "철학적 자살"이라 부른 그것이다.
다른 차원이 있다. 마르틴 부버가 "나-너(Ich und Du)"라 부르고 가브리엘 마르셀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비"라 부른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신은 부조리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부조리 이전부터 관계로서 선재한다. 이는 단순한 기복주의나 샤머니즘이 아니다. 매일의 침묵 속에서도 인간 존재에 의미가 있다고 신뢰하며 내일을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다.

권선징악과 기복신앙에 익숙한 이들에게 가장 당혹스러운 텍스트 중 하나인 성경의 욥기는 이 두 번째 차원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응답으로 읽힌다. 욥은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세계에서 신에게 항의한다. 욥기의 대부분은 "왜 의로운 자가 고통받는가"라는 항의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은 욥에게 의미를 해소해주지 않는다. 다만 폭풍 속에서 자기 모습을 현현할 뿐이다.
욥의 신앙은 사건의 의미를 해명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의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관계가 거기 있다는 데서 나온다. 이것이 카뮈가 거부했을 종류의 시지프다. 매일 돌을 굴리되 그 돌의 의미 때문에 굴리는 것이 아니라, 의미 너머의 관계 때문에 굴리는 것이다.

다른 어떤 신화들도 시지프 신화만큼 나를 매료시켰던 텍스트는 없다. 그러나 이 시지프 신화를 다룬 카뮈의 텍스트는 나와 다른 관점으로 이를 해석하고 있음을 느꼈다. 의미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살아낸다는 메타포는 동일하지만, 그 살아냄을 카뮈는 무근거의 반항에서 찾았고, 나는 의미 너머에 있는 관계에 대한 신뢰에서 찾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 반항하지 않고서도 나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