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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ound boredom

profound boredom
Photo by Birmingham Museums Trust / Unsplash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대개 멀티태스킹을 잘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보상하고, 이 인센티브 구조는 인류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멀티태스킹은 실제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일종의 미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인류가 "생산성" 자체를 본질적으로 정의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문제다.

단기적 성과를 위한 몇몇 수치를 특정 기간 내에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집착하게 되어버렸고, 그 수치를 개선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 만들어내는 가치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나 여분과 대안을 넉넉히 준비해두는 안티프래질적인 자연과는 다르게, 생산성의 함정은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을 무자비하게 가지치기하며 인류를 프래질의 늪으로 몰고간다. 성과를 측정하고 프래질을 측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당연하게도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명확한 프래질이 존재하는 구조 위에서 애써 눈을 가리며 그 위에 성과를 쌓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실 멀티태스킹은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퇴화에 가깝다. 그것은 수렵이 자유로운 구역에서 서식하는 동물들에게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의 동물은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도중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동시에 새끼를 감시하고 짝짓기 상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주의를 여러 활동에 분배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깊은 사색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한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그러나 철학과 예술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깊은 주의는 빠르게 초점을 옮기는 산만한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진다. 산만한 주의는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창조에 결정적인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못한다.

성과와 생산성이 강제하는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할 따름이다. 이완이 소멸하면 귀 기울여 듣는 재능도,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함께 사라진다.

인류가 지금 측정하고 있는 생산성이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본질적으로 지속가능한가, 진정한 가치를 더하는 행위에 기여하는가. 마치 못의 생산량을 최대화하라 지시받은 기계가, 결국 인류의 몸속 철분까지 흡수하여 못을 만들고 인류를 멸종시키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시대 앞에서, 인류는 스스로 무엇이 가치인지를 정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물론 자연은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 존재했고, 언제나 그랬듯 균형을 찾아갈 것이다. 성과사회에 지친 인류가 사라지고 살아남은 이들이 반대 방향으로 균형을 잡아가거나, 이를 극복한 새로운 종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다만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동안만큼은 깊은 심심함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는 사회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