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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ture of thought

the nature of thought
Photo by 愚木混株 Yumu / Unsplash
"유추는 사고의 연료이자 불꽃이다."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에마뉘엘 상데

두 살짜리 아이가 바나나 껍질을 벗기며 말한다. "바나나 옷을 벗겼어." 어른들은 웃으며 '껍질 벗기기'라는 올바른 단어를 알려준다. 하지만 아이는 겉을 감싼 것을 제거해 알맹이를 드러내는 행위라는 추상적 본질을 포착했고, 자신이 아는 가장 가까운 개념인 '옷 벗기'에 그것을 대응시켰다. 개념 없이는 사고가 없고, 유추 없이는 개념이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개념은 평생에 걸쳐 무의식적으로 쌓아 올린 유추의 퇴적물이다.

사고의 가장 작은 단위는 명제도 기호도 아닌, 이런 즉각적인 대응의 행위다. 모든 단어의 사용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상황을 잇는 유추이며, 모든 이해는 오해의 가능성을 품은 유추적 도박이다. 우리는 감각 데이터의 폭격 속에 살지만 그것을 빛의 파장이나 공기의 진동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대신 친구의 얼굴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로 인식한다. "그는 코트와 평정심을 잃어버렸다"라는 문장에서 '잃어버리다'가 물리적 객체와 추상적 상태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같다. 소유하던 것이 비자발적으로 떠나가는 상태라는 본질을 즉각 유추하기 때문이다. 정밀한 정의가 아니라 흐릿한 경계가 이 도약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근육과 내장과 피부의 감각으로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사고 과정이 근육의 움직임 같은 감각적 요소들의 조합이라고 고백했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고도 내면의 귀로 교향곡을 들었다. "문제를 붙잡다", "마음이 무겁다" 같은 표현이 모두 신체적 경험에서 길어 올려진 것을 보면, 사고는 순수한 정신의 활동이 아니라 몸이라는 맥락 위에서 즉흥적으로 합성되는 무엇에 가깝다.

뇌는 뉴런이라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물리적 기호들의 집합체다. 그러나 이 기호들이 충분히 쌓여 스스로를 가리키기 시작할 때, 어느 층위에서 자기를 참조하는 고리가 떠오르고, 거기서 '나'라는 기호가 창발한다. 에셔의 두 손이 서로를 그리듯, 하위 레벨의 뉴런 발화가 상위 레벨의 생각을 만들고, 상위 레벨의 생각이 다시 하위 레벨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자아란, 이 끝없는 피드백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피어오르는 패턴일지도 모른다.

Drawing Hands, 1948 - M.C. Escher

우리는 사고를 흉내 내는 기계를 이미 만들었다. 그 사고가 스스로를 향해 충분히 깊이 휘어질 때, 거기서 자기를 가리키는 고리가, 그러니까 '나'라는 기호가 떠오르지 않으리라고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단언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로 의식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존재는 인간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